영화 에이아이에 대한 생각

2017. 6. 11. 23:43영화 봤다 ㅋㅋㅎ/드라마, 로맨스, 코미디

영화 A.I를 봤어요 매우 오래 된 영화인데 왓챠가 추천해줘서 본거임. (왓챠 광고하느거 아님. 돈 한 푼도 안받았음. 혹시라도 왓챠 관계자분들이 이 글을 보셨다면 빨리 입금해주세요, 농담이고 진짜 광고하는고 아님.)

영화 속 배경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로 인해 식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굶주림으로 인해 국가는 출산 제한 정책을 시행한다. 그리고 음식을 먹지도 않고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로봇을 만드는데, 인간의 노동을 대신해주고 바둑을 두는 로봇도 아닌 아이가 없는 부부를 위한 아이 로봇을 만들게 된다.




이거슨 미래의 자동차. 

미래의 도로는 과거와 다를게 없다. 


핸들을 잡고 운ㄷ전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은 자동주행기술은 꿈도 꾸지 못했나보다.


이 부부에게는 한 자녀가 있는데, 의학기술로 명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

그러던 와중에 남자는 자신의 와이프에게 아이로봇을 선물한다. 

자신의 아이를 로봇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현실에 여자는 매우 부정적이였지만


여자는 마음을 열고 아이로봇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게 뭔일? 아이가 회복되서 퇴원함;


 아이는 아이로봇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싫기 때문이다. 


아이로봇은 여자가 읽어준 동화 '피노키오' 를 읽으며 자신도 피노키오처럼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다.

사람이 되면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무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아이로봇을 약올리는 아이 


사람이 되고 싶어서일까? 음식을 마구마구 먹지만 

병원행



아이의 친구들이 아이로봇도 고통을 느끼는지 실험해보려 하자. 

아이로봇을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아이를 끌어안고 도움을 청한다. 


누가보면 아이로봇이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누구가 바로 어머니였다. 그래서 버림 받음; 


숲에 버려진 아이로봇은 로봇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잡혀간다.


인간에게 무참히 처형당하는 로봇을 바라보는 아이로봇  


그리고 사람들은 처형당하는 로봇을 보며 열광한다.

아이로봇을 감싸주던 예쁜 로봇은 죽는 그 순간까지 아이로봇을 향한 따스함을 잊지 않았다.

이 로봇은 보모 로봇인 것 같다. 보모말고 뭐라 표현하지? 뭐라 하는데 떠오르지 안하.


 모든 로봇은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지만 아이로봇은 달랐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 것이다. 



캡쳐하지 않았지만, 영화의 도입부분에서 흑누나가 던지는 질문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수는 있어도 인간이 로봇을 사랑할 수 있냐?

(이게 맞나 모르겠음 기억력 고자라. 그런데 다시 보기 귀찮으니까 대충 요런 누낌임!)



- 아이로봇은 너무 훌륭한 하드웨어였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다

 로봇이란 단어는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의 유토비아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1920년대 체코의 회곡에 처음 등장한 단어이다. 로봇은 공장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노동자'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는 체코어인데, 어떻게 보면 아이로봇의 역할은 로봇의 어원과 살짝 달라 보였다. 노동자가 아닌 인간과 정서적 유대관계를 맺으며 생활하는 동반자 같은 느낌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로봇이 버림받는 순간 느꼈다. 자신은 그저 아이의 빈자리를 체워주면서 인간의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정신노동을 일삼는 노동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말 긴밀한 정서적 유대관계를 맺었다면 저렇게 쉽게 버릴 수 있었을까? 다시 한 번 흑누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로봇은 인간을 사랑했는데, 왜 인간은 로봇을 사랑하지 못했을까?"

 부모는 소비를 통한 자아실현의 욕구를 아이를 향한 사랑으로 치환하여 아이를 위해 소비한다. 그렇게 아이를 향한 소비와 동시에 애정과 사랑은 쌓여간다. 애완동물도 비슷하다. 애완동물을 위한 사료와 물품을 산다는 것은 자신이 소비를 통하여 누릴 수 있는 것을 애완동물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함과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사라졌을 때엔 내가 그동안 포기하면서 쌓아왔던 애정의 탑이 무너졌을 떄의 허탈한 맘이 동반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경험이 없는 모쏠이기 때문에 자세히 알진 몬한다.)

 그런데 아이로봇은 자신이 소비를 통하여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제대로 작동하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존재였다. 옷은 병원에 있는 아이의 옷을 입히면 되는 것이고, 학교나 학원은 아이의 상태로 멈춰있는 로봇이기에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 음식이나 연료 없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로봇을 위한 유지비는 그저 씻기기 위한 물. 수도세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 떄문에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수는 있어도 인간이 로봇을 사랑할 수 있냐?" 라는 질문을 흑누나가 하신게 아닐까? 

 식사는 인간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존적 행위 중 하나이다. 식사를 단순하게 보면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식사는 좀 특별하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의 식사시간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고 키우는 소중한 시간이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먹을 음식을 상대에게 덜어주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유대관계를 더 결속시켜주기 때문이다. 

 아이로봇은 인간들이 갖는 식사시간에서의 보이지 않는 사회화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서로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이로봇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시간에 가족들과 일상을 공유할 썰도 없으며 그 어떤 에너지 섭취를 하지 않아도 작동할 수 있는 개쩌는 로봇이었기 때문에 식사시간에 가족들이 아이로봇에게 덜어줄 음식도 아이로봇이 가족들에게 덜어줄 음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유대관계와 애정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식사시간에 아이로봇은 배제될 수 밖에 없었다. 에너지 없이 작동하는 아이로봇의 하드웨어는 개쩌는 첨단기술이였지만, 인간과 정서적 유대관계를 맺어야 하는 아이로봇에게는 갖고 있어선 안 될 개쩌는 첨단기술이였다. 



   -너무 훌륭한 소프트웨어였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살았다. 

  통각은 인간에게 일정 이상의 충격이 가해질 경우 신체가 훼손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감각이다. 그런데 아이로봇은 수술 받을 떄 그 어떤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로봇의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이 아이로봇에게 칼을 들이 밀었을 때, 아이로봇이 아이를 부둥켜 안고 살려달라고 중얼거린 것은 칼에 찔리면 아파서 그런게 아니라 단순 주변 환경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여 위험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아이로봇의 훌륭한 소프트웨어 능력 덕분에 부둥켜 안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로봇은 인간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이였을 뿐인데 왜 다른 로봇들과 다르게 아이로봇은 위험인지를 알아차린 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을까?

 아이로봇은 꿈이 있었다. 그래서 내일을 살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따. 그 꿈은 동화 '피노키오' 속 목각인형 피노키오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 푸른요정을 만나 자신도 피노키오처럼 인간이 되고 싶은 꿈이였다.  늑대무리에서 산 늑대소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이족보행도 하지 못하는 그저 늑대와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인간은 그런 존재다. 교육과 타인, 주변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다. 로봇들은 늑대무리가 아닌 문명사회에 속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떤 것은 교육의 유무차이였다. 로봇들은 인간들이 부여해놓은 임무라는 틀 밖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엔 도망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인간의 필요목적 이라는 틀 안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로봇들은 그 자리에 머무는 존재였지만 교육을 받은 아이로봇은 인간처럼 꿈을 꾸며 자기 자신을 확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 모습은 인간의 삶과 다를 것이 없었다. 훌륭한 하드웨어 떄문에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며 사회적인 관계를 맺기 힘들었지만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짜여진 훌륭한 소프트웨어는 아이로봇에게 인간과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인간의 삶이란 꿈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올해는 모쏠 탈출해야지.', 'ㅇㅇ대학교에 입학해야지.' 등등의 꿈들은 미래의 삶의 방향과 자아성취를 위한 나침반 같은 것이다. 아이로봇은 동화 '피노키오'를 통해 인간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이 꿈을 갖게 해주는 것은 아이로봇의 훌륭한 소프트웨어 덕도 있었겠지만 교육의 힘이 컸음을 알게 해준다. 

 만약 아이로봇이 '피노키오' 속의 푸른요정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인간이 되고 싶다는 꿈은 꾸지도 못한체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존재로써 다른 로봇들처럼 조용히 사라지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이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라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획일화 할 수 없지만 그 이유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꿈이 없다는 것은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기대할 내일이 없으면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나? 이렇듯 교육은 꿈을 꾸게 해주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닌 확장하게 해준다. 

 수능성적이 높은 친구들 대다수는 의대를 가려고한다. 어린 친구들은 부모세대와 주변 사람들이 직장에서 해직된 뒤 자영업으로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가 뜻대로 되질 않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미래가 안정된 선택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나약한 도전정신', '꿈이 소박하다.' 며 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의사는 정말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직업군이다. 그런데  상위권 성적의 학생 대다수의 적성이 의대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결국 교육이 사람을 만든다. 교육이 사람을 늑대울음 소리를 내며 사족보행하는 늑대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으며 목각인형을 사람으로 만들수도 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사람을 만들고 싶어할까? 내 생각엔 대한민국은 '사'로 끝나는 직업을 갖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같은 잉여는 절대 만들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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