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이비에 대한 생각

2018. 10. 2. 10:52영화 봤다 ㅋㅋㅎ/애니메이션




대학에 합격한 딸 



딸이 시험 잘 봤는데 딸에게 수고했다고 하기는 커녕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전하는 할머니



 인상이 아주 드럽네;



대학에 합격한 딸이 번 돈으로 도박판에서 놀고 자빠졌다



진상이 따로 없다 아주 드러운 놈이다

그런데 이 드러운 놈이 주인공이다

분량이 없는 주인공이였으면 좋겠다. 인상이나 성깔이 너무 드럽다




착하게 살아라 임마 




자신의 이마를 벽돌로 내리 찍은 남자를 잡기 위해 추적하는 성질 드러운 주인공.




딸의 일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러 간 주인공의 아내와 딸




사비이특




주인공은 사기꾼이라 외치지만 모두들 무시하기 바뿌다



자기 딸을 무자비하게 때리네 나뿐색기 ㅠㅠ





 - 종교의 노예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목사가 선언한 절대적인 명제들를 통하여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욕망과 두려움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신의 명제를 선언해주는 종교에다 자신의 재산을 쏟아붓는 것을 멈추지 않고 목사가 하는 말에 대해 1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은 목사가 뱉은 말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렇게 교회에 자신의 삶을 복속한 마을사람들의 모습은 인간다운 모습이라기 보단 그냥 노예처럼 보였으며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찬양하는 북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물론 종교인이 들으면 빡칠 수 있겠지만 사이비나 예수를 찬양하는 종교인들의 논리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한사람들의 논리와 딱히 다를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교의 노예들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행하는 목사의 독단적인 연설을 절대적인 선언으로 여기는 순간 논리적 설득이나 합리적 대화가 통하질 않게 된다. 그냥 믿으라고 강요할 뿐이고, 믿지 않으면 닥치라고 할 뿐이다. 


 사유를 통한 앎을 포기하고 비논리적인 목사의 선언을 선택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를 안겨다 줄 수 있다. 죽음, 평화, 자유, 불행 등등의 문제와 마주했을 땐 사유하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고 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얻게 된 심적인 안정은 진정한 안정이라 볼 수 없다. 현실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과 콤플렉스는 나아지질 않기 때문에 항상 같은 문제와 계속해서 마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을 외면하고 신의 이름으로 뱉어내는 목사의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은 억지로 불안감을 거부하도록 만든 거짓된 안정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주인공 딸에게 종교의 노예라 하고 싶지 않다. 딸은 대학교 입학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학업도 성실히 임했다. 그런데 아버지란 놈은 딸이 모아놓은 돈을 도박하는데 모두 탕진해버렸고 딸에게 돌려준 것은 도박으로 탕진해버린 딸의 입학금이 아닌 폭력과 욕설이였다.  주인공의 딸처럼 인생의 쓴맛, 신맛, 매운맛을 모두 겪고 정신적으로 나약해진 상태에서 목사의 달콤한 선언을 선택해 심적인 안정을 얻고자 한 딸에게 만큼은 종교의 노예라 하고 싶지 않다.


 출산을 앞둔 자신의 아내에게 무통주사를 권유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영표는 종교의 노예라고 하는게 맞겠지? 행복, 고통, 죽음, 자유와 같은 문제들을 마주했을 때 이영표는 사색과 탐구가 아닌 성경을 펼치고 읊조리기 바쁜 사람이였으니까. 자신의 삶을 성경에 국한시켜버리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닌 아내에게까지 이어간 것이다.

물론 둘이 선택한 것이니 존중은 하겠지만 그닥 자유로운 인간으로 보이진 않는다.




 

 - 종교보다는 이야기


 종교를 믿으면 윤리적인 존재가 될까? 그런데 믿지 않아도 충분히 예수처럼 윤리적일 수 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종교도 신도 아닌 이야기와 사례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 마을 사람들이 열광하고 따른 것은 목사도 신도 아닌 이야기였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자 다시 걷게 된 이야기, 생명수를 마시면 건강해진다는 이야기, 종교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따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존재를 찬양하는 것 같지만, 까놓고 보면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떡 5개와 물고기 2개를 굶주린 사람들과 나눠먹은 따뜻한 이야기들을 뱉어내기 바쁘다. 사람들을 윤리적이게 하는 것은 예수나 종교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야기와 사례들이 인간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안겨주어 예수처럼 윤리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에 목숨을 걸고 참전했던 러시아 여성들은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땐, 남편들은 다른 여자에게 떠났고, 같은 여성들에게도 전쟁터의 남성들과 썸이 있었을거라고 추궁받는 등 제대로 환영받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안겨줘 윤리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해주는 것이지 단순 종교의 존재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종교를 따르지 말라는 것은 좋은 이야기로 가득한 경전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다. 종교에 자신의 삶을 복속시키지 않고 목사의 선언을 단 1의 의심도 없이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삶의 목적을 종교의 선언으로 삼는 것이 진짜 자유로운 인간다운 삶일까? 목사가 뱉어내는 말에 대해 1의 사유도 없이 그저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어쩌면 나약한 심적인 노예의 길을 걷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전의 좋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수 많은 진리와 꺠우침을 얻을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경전이 아니여도 충분히 터득할 수 있는 수단이 많다.
더해서 종교나 경전이 아니여도 인간이 진리를 꺠우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어쩌면 인간을 향한 진정한 이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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