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감독편에 대한 생각

2019. 6. 22. 11:09영화 봤다 ㅋㅋㅎ/액션, 스릴러

예쁜 여배우가 나오나요? 넹 ㅎㅎ 설현 나옴 ㅎㅎ

멋진 남배우가 나오나요? 넹 ㅎㅎ 김남길 나옴 ㅎㅎ

이 영화는 치매걸린 살인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본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 기억법'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영하 작가가 쓴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떤 SBS에서 청년들을 위한 강연을 했는데, 거기에서 뱉어낸 이야기들이 상당히 흥미로워서 팬이 되었다. 그래서 알쓸신잡을 비롯하여 김영하 작가가 쓴 에세이들을 모두 읽어봤다.

영화에서 김영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과감할 정도의 솔직한 생각들이 이 영화에서도 묻어나 있어서 마치 김영하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치매걸린 할아버지 이 분이 주인공이시다. 

설현 존예~

 

또 살인이야~?

 

 

치매인 설경구는 매일 일기를 쓰고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거기엔 자신이 어린시절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가득하다..

설경구의 아버지가 군인으로 나온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군인일까? 하고 생각했는데, 나의 머릿 속에는 김영하 밖에 없었다. 김영하님의 아버님은 군인이셨다. 어렸을 적의 기억이 작용한건 아닐까? 하지만 김영하가 젊은 시절 글을 쓸 때 아버님께서 재떨이를 직접 치워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의 설경구는 아버지를 죽인다.

 

하지만 설경구의 살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과 그렇게 설경구는 아동학대,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 자신의 반지를 삼켰다고 강아지를 학대한 개주인 여성, 집이 없는 아이들을 자신의 노예처럼 다룬 노숙자까지. 설경구는 이런 잔혹한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당위로 여겨 살인이 아닌 청소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살인을 이어간다.

동물병원 의사였던 설경구는 의도치 않게 고양이를 죽이고 만다. 치매로 인하여 항암주사를 세 방이나 놓아버린 것이다.

 

결국 설경구는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기록하기로 결정한다. 이런 모습은 김영하의 습관과 매우 유사하다

운전을 하던 설경구는 앞차를 박는다.

그런데 박은 차에서 뭔가?

살인자인 설경구는 바로 느꼈다. 저 사람이 살인자라는 것을

 

 

 - 자신의 더러움을 외면하는 선택적 치매

 설경구는 자신의 살인을 청소라는 개념으로 재정의했다. 폭력과 범죄로 더럽히고 있는 존재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범죄자들을 혼내주는 스파이더맨처럼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범죄자들을 거미줄로 제압한 다음 경찰에게 보냈다. 하지만 설경구는 범죄자들을 경찰에게 보내지 않고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설경구가 죽인 놈들은 여자, 아이, 동물,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롭히는 쓰레기였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잔혹한 정의의 사도에 가깝다. 하지만 설경구를 정의의 사도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더러움을 제대로 마주하여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장면은 자신의 치매로 인하여 고양이를 죽인 장면에서 나온다.

 설경구가 정의로운 존재였다면, 자신이 실수로 고양이를 죽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인에게 사과해야 한다. 하지만 설경구에게서 그런 모습은 단 1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상태로 고양이만 건네줄 뿐이었다. 물론 수치스럽고 죄송한 마음에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혼자 반성을 하거나 자책을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무고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살인이라는 잔혹함을 감수한 정의의 사도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타고난 살인자였다.

 어쩌면 설경구가 저지른 살인들은 여성, 아이, 동물, 가난한 사람처럼 나약한 존재들을 지켜주기 위해, 사회 정화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정의의 사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란 잔혹한 행위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어서 청소라고 포장하여 외면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주변에서도 설경구와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이를 포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 외에도 자신의 단점, 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사회탓, 남탓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바라볼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내 안에도 수치스럽고 더러워서 외면하고 싶은 또 다른 내가 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목덜미 냄새를 맡아보고 싶은 마음, 길거리에서 코딱지를 파고 싶다는 더러운 나 자신, 고약한 방귀냄새처럼 말이다. 물론 자신의 단점을 외면한 상태로 산다면 자존감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행복한 바보, 배부른 돼지와 다를게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더러운 면들을 품고 있더라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품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나의 더러운 면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존재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요소들에 대해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해야 한다. 물론 돌아오는 답들은 차갑고 쓰라릴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나를 당당하게 마주하고 복잡다단했던 요소들을 다시 재정립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하지만 설경구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할 존재,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 생각하는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더러운 면을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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