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에 대한 생각
2018. 6. 19. 11:54ㆍ영화 봤다 ㅋㅋㅎ/드라마, 로맨스, 코미디
은 교
왜 중고서점으로 향하지 않는가..
불 좀 키고 먹지 이 사람아..
할아버지 몸이 나보다 좋다.
오늘부터 운동한다.
다른 사람 집에서 머하냐;; 도깨비 기달리냐;
거기 앉아 머하냐;
여고생이 아끼던 거울이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
무슨 힘과 용기가 났는지 거울을 가져옴;;
어린애나 할 법한거를 할아버지께서;
나는 변태라서 베드신이 많이 나오는 영화라서 봤지만, 여고생을 만나고 난 뒤의 할아버지 삶을 보면 전반적으로 많이 바뀌어있다.
- 청춘에 대한 갈망
'설렘', '희망', '도전'이라는 단어는 청춘과 젊음을 연상시키는 말들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바라보며 설렘을 느껴서 희망을 품고 도전하는 청춘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설렘을 안고 도전했던 것들이 이제는 무뎌지고 설렘을 자극했던 것들도 하나 둘 사라져서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영화 속 이적요(박해일)처럼 막대한 재산을 가졌다 하더라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어떠한 것도 자신에게 새로운 설렘과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라도 있어야 돈을 소비하던가 할텐데 그 무엇도 없으니 삶 자체가 공허하고 다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설렘과 희망을 품고 새로움을 맞이할 수 있다면 나이가 90살이어도 젊은이이자 청춘이 아닐까?
한은교(김고은)가 절벽 밑으로 거울을 떨어트렸을 때에 거울을 가지러 가는 것에 대해 꺼려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살면서 쌓아온 경험과 지식들을 기반으로 했을 때에 암벽타기 전문가가 아니라면 굳이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가 죽을 수 있는 위험을 마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벽 밑으로 내려가서 거울을 챙겨다주기 보다는 거울을 떨어트려 울고 있는 한은교(김고은)에게 더 좋은 거울을 사주겠다며 달래주는 것이 최선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적요(박해일)은 달랐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계산하기 보다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순수한 아이처럼 절벽 밑으로 내려가 절벽 밑으로 내려가서 한은교(김고은)의 거울을 가져오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적요(박해일)은 한은교(김고은)의 권유에 의하여 자신의 신체에 헤나를 했다. 이 또한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몸에 타투 하나라도 해본 어른이라면 모르겠지만, 눈썹 문신 조차 해보지 않은 남성이 자격증도 없는 낯선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를 허락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적요(박해일)은 달랐다. 한은교(김고은)이 권유하고 원하는 것들을 모두 허락해주었다. 그 허락의 근원은 설렘과 호기심이라는 청년들이 품고 있는 속성에 있었다. 이적요(박해일)처럼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 낯선 것들을 향한 설렘과 호기심이 생긴 이유는 한은교(김고은)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손녀뻘에 가까운 한은교(김고은)을 바라보며 설렘을 느끼는 이적요(박해일)을 도둑놈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렘을 품고 낯선 것에 대해 도전하는 이적요(박해일)의 모습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 청춘을 사는 젊은이의 모습에 가까웠다.
- 다시 생각해봐야 할 섹스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지 알아요? 외로워서 그래요" 은교의 도발적인 대사를 바라보고 있으면 대다수의 어른들은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섹스는 무슨 ㅉㅉ" 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어른들도 학창시절에 외로움을 느끼고 성욕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미성년자 섹스를 향한 보편화 된 생각의 구조 중 하나는 '미성년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미성숙하기 때문에 지켜줘야 한다.' 와 같다. 그런데 정신연령이 4세 수준에 이르는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30세의 사람이 섹스하는 것은 괜찮고, IQ300의 뛰어난 두뇌로 정신적, 신체적 성숙을 갖춘 19세 362일 되는 미성년자가 섹스를 하는 것에 문제가 있을까? 물론 이런 비유는 상당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이런 비유를 든 이유는 대다수의 어른들이 단지 미성년자의 섹스에만 금기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시간 기준에 따라 육체적, 정신적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모든 미성년자들을 성숙하지 못한 존재로 내려다 보는 어른들의 우월성에 근거한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학생들이 인권, 두발자유에 대해 외칠 때면, 대다수의 어른들은 '학생들이 뭘 안다고 공부나 해라' 와 같은 말만 반사적으로 내뱉는다. 청소년들의 자유를 억압하는게 아닌 보장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육체 발달과 성욕에 대해 문제삼는 것을 버리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성교육을 할 때에도 성병에 대한 위험성만 강조하면서 섹스를 금기시할 것이 아니다. 안전한 섹스가 무엇이고 어떤 섹스를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교육을 해야하는 것이다.
은교는 섹스의 이유를 '좋아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라고 답했다. 은교의 섹스는 외로움으로 부터 벗어나 의존과 위안을 찾기 위함이었다. 과거와 다르게 지금의 섹스는 그런 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경쟁으로 인하여 짊어지게 된 삶의 무게와 압박감으로 인한 위안과 의존을 누군가는 종교, 사주, 로또를 통해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섹스에서도 이를 찾을 수 있따고 생각한다. 인간의 섹스는 다른 동물들처럼 서로의 성기를 마찰하여 애액을 배출하는 단순 육체적인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외면과 내면을 모두 드러냈을 때에 이해하고 포용해줄 존재가 가족 외에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에 따라오는 심적인 위안과 안정까지 안겨주기 때문이다. 상대의 단점들이 나에게 이익으로 작동하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서로의 단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인 섹스는 경쟁에 지쳐잇는 미성년자 아이들이 찾고 있는 진정한 위안과 의존이 아닐까? (물론 내가 못본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 속에서 그려진 은교는 무한 경쟁을 부르는 입시로 인하여 지쳐있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다.)
은교가 말한 '외로워서 그래요' 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우리가 청소년들을 경쟁으로 내몰면서 외롭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해서 문화적 기능을 잃어버리고 출세를 위한 경쟁의 사다리로 전락해버린 대학교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고 있는 갓 성인이 된 20대들 또한 불안정하고 외롭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섹스를 저렴하고 가벼운 것으로 생각을 해야할까? 물론 미성년자라고 하여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포함시켜선 안 된다. 미성년자 의제강간 보호법에 따르면 만 14세 정도로 설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그 미만의 나이는 포함시켜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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